가을엔 시(詩)를 쓰고 싶다. 낡은 만년필에서 흘러 나오는 잉크빛보다 진하게 사랑의 오색 밀어(密語)들을 수놓으며 밤마다 너를 위하여 한 잔의 따뜻한 커피같은 시(詩)를 밤새도록 쓰고 싶다
가을날 / 김현성
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 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 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 나는 붉은물이 든 잎사귀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대 오는 길목에서 불 붙은 산이 되어야지 그래서 다 타 버릴 때까지 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 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 그런 맹세만으로 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 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
가을시 2 / 유재영
지상의 벌레소리 씨앗처럼 여무는 밤 다 못 쓴 나의 시 비워둔 행간 속을 금 긋고 가는 별똥별 이 가을의 저 은입사(銀入絲)!
* 은입사 : 청동이나 주석 등에 새겨 넣은 은 줄.
가을 저녁의 시 / 김춘수
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.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.
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.
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.
가을사랑 / 도종환
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.
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읍니다.
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.
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읍니다.
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.
가을엔 1 / 추경희
시간이 가랑잎에 묻어와 조석으로 여물어 갈 때 앞 내 물소리 조약돌에 섞여 가을 소리로 흘러내리면 들릴 듯 말 듯 낮익은 벌레소리 가슴에서 머문다 하루가 달 속에서 등을 켜면 한 페이지 그림을 접 듯 요란 했던 한해가 정원 가득 하늘이 좁다
가을의 시 / 김초혜
묵은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
망망하게 허둥대던 세월이 다가선다
적막에 길들으니 안 보이던 내가 보이고
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낀다
가을에 아름다운 것들 / 정유찬
가을엔 너른 들판을 가로 질러 노을지는 곳으로 어둠이 오기 전까지 천천히 걸어 보리라
아무도 오지 않는 그늘진 구석 벤치에 어둠이 오고 가로등이 켜지면 그리움과 서러움이 노랗게 밀려 오기도 하고